한글날 바로 그날 태어난 또 하나의 한글, 100주년을 맞은 '한글 점자' 이야기

올해가 한글날을 기념하기 시작한 지 딱 100년째 되는 해라고 합니다. 그런데 100년 전 그날, 또 하나의 한글이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은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KBS 1라디오 '정관용의 시사본부'에서 류란 기자가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해봤습니다.
"가갸날"이 태어난 날, 또 하나의 한글도 태어났다
1926년 11월 4일, 서울의 식도원이라는 요리집에 조선어연구회(지금의 한글학회)와 잡지사 신민사 관계자 수백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여기서 기념일 이름을 정하자는 논의 끝에 "가갸날"이 탄생했고 몇 차례 이름이 바뀌어 1945년부터 10월 9일 한글날로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박두성이라는 교사가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발표했답니다.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에서 '백성 민' 자리에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뜻하는 '맹' 자를 넣어 만든 이름인데, 볼록한 점 여섯 개를 조합해 한글을 표시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6점식 한글 점자라고 합니다.

박두성 선생은 누구였나
송암 박두성 선생은 조선총독부가 세운 재생원이라는 기관에서 시각장애인을 가르치던 교사였다고 합니다. 1923년 조선점자연구위원회를 비밀리에 조직해 한글 점자 연구에 매진했다는 기록이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다는데요. 광복 후에는 당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점자로 전하는 소식지 "촛불"을 약 6년 동안 200여 호나 발간했다고 합니다. 박두성 선생이 그날 신문을 읽고 중요한 내용을 논평하면 제자가 그 말을 받아 점자로 찍고, 그걸 묶어서 시각장애인들이 돌려봤다는 방식이었다고 하네요.

한글날은 있는데, 한글 점자 기념일도 있을까
한글 점자 기념일도 있습니다. 2020년 점자법 개정으로 훈맹정음이 발표된 11월 4일이 "한글 점자의 날"로 지정됐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한글날은 국경일이자 법정 공휴일인 반면, 한글 점자의 날은 법이 정한 기념일일 뿐 공휴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류란 기자가 자기 책상에 있는 달력을 찾아봤더니 11월 4일에 아무 표시도 없었다고 하는데, 저도 이 얘기를 듣고 제 달력을 한번 들여다봤습니다. 역시 표시가 없더라고요. 올해가 훈민정음 반포 580돌과 한글날 지정, 한글 점자 탄생이 나란히 100년을 맞은 해라는 걸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대목입니다.

편의점에서 직접 확인해 본 결과
류란 기자가 서로 다른 지역의 편의점 두 곳을 직접 방문해 확인해봤다고 합니다. 법으로 정해진 비상약 11종에는 전부 점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같은 냉장고에 있는 탄산수나 커피에는 점자가 없었고 과자류는 점자가 있는 제품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법이 다르기 때문이라는데요. 약사법은 점자 표시를 의무로 정했지만(2024년 7월부터 시행) 식품표시광고법은 점자 표시를 "할 수 있다"로만 정해놔서 사실상 업계 자율에 맡겨져 있다고 합니다. 2023년 국회 법안 심사 소위 회의록을 찾아보니 비용 부담과 포장 기술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의무화 대신 자율화와 QR코드 활성화 쪽으로 방향이 정해졌다고 하네요.

자율에 맡긴 결과, QR코드도 못 찾는다
그래서 자율에 맡긴 결과가 어땠을까요? 류란 기자가 대형 업체의 잘 팔리는 과자 10개를 직접 구입해 확인했는데, 점자도 QR코드도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일부 주류에는 점자와 QR코드가 함께 있긴 한데, QR코드가 어디 붙어 있는지 시각장애인이 손으로 만져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게 문제라고 합니다. 2024년 정부 가이드라인에 QR코드 위치를 쉽게 찾도록 표식을 만들라는 내용이 있지만 강제력이 없다고 하는데요. 작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서미화 의원이 "우리나라 전체 식품 약 15만 종 가운데 QR코드가 들어간 제품은 0.1%도 안 된다"고 지적하자, 오유경 식약처장이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인 것 같다"고 답했다는 대목이 이 글을 쓰면서 가장 마음에 남았습니다.

박두성 선생이 100년 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정신을 이어받아 만든 한글 점자는 지금 법적으로는 일반 활자와 같은 지위를 인정받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식품과 의약품 정보는 단순한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안전과 건강에 직결된 문제라는 걸 생각하면, 100주년을 맞은 올해 달력에 11월 4일을 한 번쯤 표시해보는 것부터 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 KBS 1라디오 정관용의 시사본부 · 한글이 둘? '훈O정음'도 있다? | 류란 KBS 기자
※ 이 글은 위 영상을 바탕으로 요약·정리했으며, 요약 내용은 원 영상의 취지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작성했습니다.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디자이너는 목수가 되고, 사장님은 AI 직원을 씁니다 — PD수첩이 짚은 'AI와 일자리' (0) | 2026.10.15 |
|---|---|
| 전세사기로 날린 보증금, 국가가 최소 3분의 1 보장한다|11월 13일 시행 · 얼마를, 언제, 어떻게 받나 (0) | 2026.10.14 |
| "촉법인데요?" 당당했던 아이들, 최근 이렇게 됐습니다 (1) | 2026.10.12 |
| AI한테 해킹당한 은행, 그런데 범인은 이력서 쓰다 덜미를 잡혔다 (0) | 2026.10.11 |
| 1억 원도 안 되는 돈 때문에 갈라서는 형제들 — PD수첩이 담은 '상속 전쟁' (0) | 2026.10.09 |